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8.15 광복 (문단 편집) == 8월 15일 == 이날 아침 [[여운형]]은 엔도 정무총감과 교섭을 벌여 [[일본인]]들의 무사 귀환을 조건으로[* 조선 거주 일본인에 대한 [[조선인]]들의 증오가 극에 달해 있었던 상태였기 때문에 [[일본인]]들의 두려움 역시 매우 컸다. 자세한 건 [[히키아게샤]] 참조.] 5개 조항[* 1.전국적으로 정치범, 경제범을 즉시 석방할 것. 2.[[서울]]의 3개월 분 식량을 확보할 것. 3.치안 유지와 건국 운동을 위한 정치 운동에 대하여 절대로 간섭하지 말 것. 4.학생과 청년을 조직, 훈련하는 데 대하여 간섭하지 말 것. 5. 노동자와 농민을 건국 사업에 동원하는 데 대하여 절대로 간섭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당혹스러운 조건이었지만 [[소련군]]의 [[경성부|경성]] 입성 소문이 돌던 상황에서 다급했던 총독부는 여운형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총독부는 [[8월 17일]] 정도면 소련군이 경성에 진주할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당시 소련군은 청진에서 일본군과 한창 전투 중이었다. 일본군이 예상보다 격렬하게 저항하는 바람에 청진에서의 교전은 8월 18일이 되어서야 끝났다.] 이날 '[[옥음방송|중대 발표]]가 있으니 조선인들은 경청하라'는 벽보가 나붙었다. 자세한 방송 내용에 대해서는 [[옥음방송]] 참고. 그러나 당시 [[라디오]]를 가진 조선인들은 많지 않았고 천황의 종전 발표 방송은 잡음이 심했고 어려운 난해한 [[한자어]]가 섞여 있었던 데다 당시 쓰던 [[일본어]]도 아니고 [[문어체]]로 방송되었다. 때문에 방송 내용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의 일본에서는 [[천황]]의 조서, 칙명 등등 온갖 공문서에 문어체가 사용되었고 항복 발표 방송도 마찬가지였기에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 소수였다.] 그나마 [[매일신보]] 등의 신문 매체에는 해당 조서의 원문이 실려 있었기에 한문을 읽을 수 있는 지식인은 표면적인 내용을 한결 수월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서는 물론이고 당시 신문에 실린 [[아베 노부유키]] 총독의 논고 역시 장황하고 암호문 같은 문체로 쓰인 탓에[* 아베 총독의 논고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지금껏 30여년 간 일본과 조선은 한 몸으로 지내 왔고 전쟁에서도 함께 싸우며 고생해온 사이였다. 그랬는데 이제 전쟁을 그만두게 되었으니, 지금 이 소식이 충격적일 것임은 모르는 바 아니나, 경거망동하여 '''동족상잔'''의 비극을 일으키지 말라." 그의 경고가 무색하게도 방송 하루 만에 일본의 항복 소식이 조선 전역에 퍼지면서 조선 전역의 일본인들은 가진 것을 대부분 잃은 채로 쫓겨나 [[히키아게샤]]의 대열에 합류했다.] 행간의 의미를 바로 이해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히로히토는 '전쟁을 끝내고 평화시대를 연다', '[[연합국]]의 공동성명을 수락한다'는 내용의 '''종전만을 언급'''했을 뿐,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위 방송을 전부 이해하는 조선인이 있었다 하더라도 종전이 당장 조선의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광복을 뜻한다는 것을 알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이런 방송을 했다고 해서 15일에 바로 일본군들이 일본으로 철수하여 빠져나간 것도 당연히 아니었기 때문에 대다수의 조선인 민중들로서는 뭔가 긴가민가하는 상황이었고 해방의 첫날은 조선 민중에게는 전혀 예기치 않게 찾아온 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날 바로 [[태극기]]를 들고 쏟아져 나와 [[만세]]를 부르며 환호한 것은 아니었다.[* 거기다 광복 당일에는 [[히로시마]]에서 원자폭탄에 피폭사당한 [[이우]] 왕자의 장례식이 거행된 것도 한몫했다.] [[강준만]] 같은 경우는 '방송 직후 바로 조선 민중들이 반응하지는 않았지만 오후부터 서서히 마포 형무소와 [[서대문형무소]]의 정치범들이 석방되기 시작했고, 이 사실이 퍼져 나가면서 경성이 들썩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기타 증언들도 마찬가지다. 당시 정오에는 조용했지만 '''반복된 라디오 방송과 [[일본인]]들의 이상한 분위기, 행정의 공백(배급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든지), 그리고 광복을 맞았다는 입소문 등으로 당일 오후와 밤 동안 도시 지역에는 광복 소식이 퍼지고 있었다'''고 한다. [[조정래(소설가)|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에서는 이 부분이 은근히 고증이 잘 되어 있다. [[8월 15일]] 광복 당일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가만히 있다가 그 다음 날부터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파일:attachment/gwangbok1.jpg]] 8.15 당시 [[경복궁 광화문|광화문]] 사거리의 모습이라고 하나 정확하지는 않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8월 15일 당일에 저렇게 사람들이 모여들었을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며 이후의 사진일 가능성이 높다. 사진의 [[태극기]]의 태극 무늬가 비정상적으로 큰데 [[일장기]]에 덧칠한 태극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